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황후 여씨 (문단 편집) ===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 ===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여태후였으나 그도 사람인지라 말년에 가면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사망하고 만다. 죽음의 계기도 심상치가 않았는데, 《사기》 〈여태후 본기〉에 따르면 갑자기 나타난 푸른 개처럼 생긴 괴물이 겨드랑이를 툭 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태후가 지나는 길에 쥐새끼라도 지나갔으면 눈에 안 띌 리가 없을 텐데, 주변 사람들은 되레 '그런 게 있었느냐'는 반응이길래 점을 쳐봤더니 '''죽은 조왕 [[유여의]]가 태후에게 자신은 물론 자기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여후는 황제를 제멋대로 세우고 교체했으며, 유씨 번왕들의 땅을 찢어서 여씨들에게 주고 왕으로 세우는 등의 폭거를 저질렀기에 개국공신들은 여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여후는 장안으로 복귀하자 조왕 여록을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북군(수도 방위군)을 장악하게 하고, 양왕 여산을 상국으로 삼아 남군(황궁 수비군)을 지휘하게 한 뒤 '내가 곧 죽을 텐데 그러면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내 장례를 미루고 군사들을 동원해 황제를 사수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여후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태후라는 명분이 있어서 공신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후 사후에는 유씨와 공신들이 여씨를 몰아내려 할 것은 명백했다. 이 사실은 여후도 잘 알고 있었지만 유씨와 공신들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여후는 유씨와 공신 세력들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했다... 라기 보다는 처리하는게 불가능했다. 당장 북쪽에서 흉노가 언제 처들어올지 모르는 판인데 공신들을 처리했다간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흉노의 묵돌 선우로부터 모욕을 당했는데도 두려워서 받아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여씨들 중에는 군사를 잘 부리는 이가 없었던 반면 유씨와 공신들은 초한전쟁 당시 경험 때문에 군사를 부리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대다수였다.] 과연 여후가 죽자 장안에 있던 [[유장(전한)|유장]]은 아내인 여록(조왕 겸 상장군, 북군 통솔)의 딸을 정보원 삼아 여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참에 자기 형인 제왕 유양(劉襄, ? ~ 기원전 179)을 황제로 세울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고제의 [[혜제(전한)|적자]]가 자식없이 죽었고 전소제 및 후소제는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정황이 있었으므로 고제의 [[유비(전한)#s-2|서장자]] 유비의 장자인 유양은 충분히 제위를 노려볼 만한 인물이었다.] 유양에게 "이러다가 나 죽겠다. 빨리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오라. 안에서 내응할 테니 여씨를 다 족치자"는 밀서를 보냈다. 제왕 유양이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자 상국이던 양왕 여산은 관영에게 토벌군을 맡겼다. 그러나 관영은 조금 가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주저앉더니 은밀히 제후들에게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 같이 때려야 반란 혐의를 안 뒤집어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라고 귓속말을 보낸다. 근데 이를 몰랐던 여씨들은 "설마 관영이 배신하진 않겠지? 관영이 제나라 군사들과 격돌할 때 거병해야겠다(…)"고 정하는 바람에 서로 생각이 엇갈렸고 그대로 대치가 이어진다. 장안의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낀 태위 [[주발(전한)|주발]]은 승상 [[진평]]과 상의했는데, [[역상]]의 아들 [[역기]]가 상장군 여록과 친하다는 걸 떠올리고 역상을 인질로 삼아 역기를 협박했다. 결국 역기는 부친을 살리기 위해 '병권을 태위에게 인도하고 영지에서 제나라를 막는 게 낫겠다'고 여록을 속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여후의 여동생 [[여수(전한)|여수]]는 '상장군이 군사를 버리고 어딜 가느냐! 우린 다 죽었구나!'라고 화를 내며 방의 재물을 모조리 마당에 뿌려버리는 통에 계획이 물거품이 될 뻔했지만, 역기가 '황제도 북군(수도 방위군)의 지휘를 태위에게 맡겼다'고 추가타를 날리자 결국 낚인 여록은 인수를 대뜸 내주고 말았다. 주발은 인수를 확보하자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우단(右袒, 오른쪽 어깨를 내놓는다)하고, 유씨를 따를 자는 [[좌단]]하라"고 명령했는데,[* 사실 인상깊은 일화긴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의 결의 표명으로 줄곧 써먹던 방식인지라 이게 오리지날은 아니다. 당장 그보다 수십년 앞선 [[진승 오광의 난]]에서도 동일한 일화가 존재할 정도.] 모든 장병들이 갑옷의 왼쪽 어깨 부분을 풀었다. 하지만 남군(황궁 수비군)은 아직 양왕 겸 상국 여산의 수중에 있었다.[* 한나라의 군사제도에서 북군은 수도의 방위를 담당하는 부대였고, 남군은 황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후한 말의 제도에서도 한나라의 중앙군은 대장군이 관할했지만, 황궁의 경비는 황제의 직속 병력으로 예외였다. 태위인 주발의 명령빨이 정규군인 북군에게는 먹히지만, 근위대인 남군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여산과 맞짱을 뜰 자신이 없었던 주발은 유장에게 '일단 입궁해서 황제부터 지키라'며 병사 1,000명을 지원해주었다. 유장이 일단 궁성에서 상황 좀 볼까 하며 서성이고 있었는데, 궁문에서 입구컷을 당해 멍때리던 여산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정적이 흐르는 사이 상황 파악을 조금 빨리 마친 유장이 다짜고짜 여산을 기습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여산의 부하들은 싸움다운 싸움도 못한 채 패퇴했고, 도망쳐서 화장실에 숨은 여산이었지만 유장에게 발각당해서 참살되었다. 칼과 몽둥이로 시작된 초-한 시대의 결말에 걸맞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궁성을 완전히 정리하자 여씨 일족을 모조리 잡아다 베어버렸는데 여록이 제일 먼저 참수당했고,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맞아 죽고 말았다.[* 진평은 여수의 뒤끝이 두려워 고제의 밀명을 어기면서까지, 번쾌를 안 죽이고 놔뒀는데 여수는 이것만으로도 진평에게 원한을 가져서 6년에 걸쳐 그를 모함한 전적이 있었다.] 훗날 신·후한 교체기의 난세때 관동의 [[적미]]군이 [[시안(도시)|장안]]에 들어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했는데, [[한고제|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다. 이때 여후의 시신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생전의 전횡에 대한 업보 때문인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에 의해 고황후의 시호를 영구박탈당하고, 그 시호는 [[위표]]의 첩에서 [[한고제]]의 후궁이 된 [[고황후 박씨]]에게 돌아갔다. [[고황후 박씨]]는 문제 유항의 어머니로, 여후의 후손은 확실하게는 혜제까지가 끝이었지만,[* 전소제와 후소제가 혜제의 아들이 맞다는 전제하에는 후소제가 끝이겠지만 전소제와 후소제는 혈통이 불확실해서 혜제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므로 확실하게는 혜제까지가 여후의 후손이다.] '''전한 문제를 시작으로 [[전한]]과 [[후한]], [[촉한]]의 황제들은 전부 이 [[고황후 박씨]]의 후손들이었다.''' 박씨는 한 고제의 총애를 잠깐 받고 끝나 [[여후]]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고, 현명하게 처신한 덕분에 유방의 여인들 중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